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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6 시 - 봉숭아물
  2. 2009/05/22 블로시스 30 방향성에 관하여 (3)
  3. 2009/05/20 요나 vs 하나님 (2)
  4. 2009/05/20 밭농사의 후유증으로.. (3)
  5. 2009/05/19 익숙할수록 쉽게 잊히는 것들

시 - 봉숭아물

시(詩)가 머무는 찻잔 | 2009/05/26 00:25 | 야기꾼

봉숭아물
                   

여름이 물든 저녁
봉숭아꽃 움큼 따다
흰 햇살 설설 뿌려
하늘 위에 짓이기고

밤에도 푸른 잎새
붉은 꽃잎 살짝 덮어
실바람 칭칭 감아
손톱에 동여매면

아침녘 찬 이슬로
손톱 위에 내려 앉아
그리운 사람 하나
마음에 물들이다

                        - 야기꾼 시(詩) "봉숭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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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나는 어떠한 동기로 블로시스30에 참여하고 있는가?

21세기 기독교회는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불신자들과의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이상 교회 울타리 안에 끼리문화 게토문화로 숨어있지 말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 세상과 사람들과 접촉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법, 울타리 밖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 중 효과적인 것이 인터넷이고, 블로그라고 생각했다. 또한 크리스천 블로거들의 네트웍이라는 공동체적 활동으로 충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로시스30을 통하여 이러한 점들을 기대하고 참여하게 되었다.

질문 2.

현재까지 논의된 BLOSIS30의 내용 중 내가 동의하는 부분은 어떠한 부분이며,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어떠한 부분인가?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참여 공유 개방의 웹2.0 모토에 동의하며 블로시스30이 이 가치 아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다만 그 동의된 사항에 대하여 잘 지켜지지 못하는 모습도 보게된다. 좀 더 활발한 포스팅과 다양한 컨텐츠 개발이 필요할 듯 싶다. 가령 각자의 특성에 맞는 전문화된 컨텐츠 영역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질문 3.

블로시스 맴버십에 대한 나의 의견은?
(현재 그리고 향후)

블로시스30의 모토가 참여 공유 개방의 웹2.0 가치를 따른다면 폐쇄적 멤버십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새로운 멤버에게 언제든 열려있되 아무나 받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블로시스30이 되기를 원한다.
이를 위하여 블로시스30 멤버십에 들 수 있는 기준을 분명히 세워야 할 것이다.
가령 멤버십 내부 추천에 의해서라던지 회원 몇인의 동의가 필요하다던지..


질문 4.
블로시스30 향후 모임 진행과 관련된 나의 생각은?

일단은 활발한 웹 포스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웹사이트 하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게시판에 항상 New 표시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모든 멤버들이 활발하게 포스팅 해야 할 것이다. 
온라인 뿐 아니라 오프라인 상에서의 모임도 중요할 것이다. 적어도 한달에 1회의 모임은 적당하다고 본다. 다만 웹2.0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 답게 온라인 상에서의 활발한 교제가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질문 5.
블로시스30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 지향점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까지!
참여 공유 개방
웹2.0의 모토야 말로 블로시스30이 붙잡아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30대 크리스천 블로거들의 네트워크이지만 울타리 밖으로 손 내밀 수 있는 공동체이기를 원한다. 
크리스천 팀블로그이지만 불신자들도 쉽게 접근해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블로그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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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유니스(Eunice) 2009/05/28 10:17

    와우~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블로시스30~ 정말 공감합니다~ ^^

  2. BlogIcon 세계개척자 2009/06/08 03:55

    중요한 의견들 고마워! 그 참여, 공유, 개방의 가치가 쉽지만은 안네 그려- 그래서 아무나가 아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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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vs 하나님

야기꾼의 성서 이야기 | 2009/05/20 09:45 | 야기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글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 요나 3: 10 ~ 4: 3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단다.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시란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미로우며 아름다운 기도란 말인가? 

그런데 그 앞뒤 문맥을 보아하니 이건 좀 이상하다.
3장 10절에서 니느웨가 죄에서 돌이킨 것을 보신 하나님이, 
니느웨를 벌하지 않으시기로 하였다.
4장 1절에서 이를 본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했다 한다. 
그래서 4장 2절의 저 기도를 했다.
그러고는 4장 3절에서 이젠 차라리 죽여달라고 생때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다는 저 요나의 기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오래전에 모 드라마에서 고두심이 히트시켰던 말이 하나 있다.
"잘났어~ 정말~"
이 말이 정말 상대방이 잘났다고 칭찬해주는 말이었던가?
아니다. 이건 반어법이다.
속된 세상말로 "네 팔뚝 굻다"와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다.

그렇다. 지금 요나는 반어법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1장 3절을 보면, 처음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말씀하셨을때..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였다고 나와 있다..
세상에.. 어디를 간다고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스는 하나님이 안계시는 뭐.. 치외법권지역 같은 곳이란 말인가?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을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다. 지구 끝까지 어느 곳으로 도망치더라도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선지자 요나가 다윗의 시편을 모르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하였다.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다.

이리도 담대한 사람이니 하나님 앞에서 마구 비꼬는 건 못할쏘냐?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이 참으로 놀랍다.
4장 4절에서 하나님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라고 딱 한마디만 하신다.
사람의 성질대로라면 번개라도 내려 태워 죽일것 같은데 
딱 한마디 하시고서는
4장 5절에서 니느웨 성 동편에 앉아서, 
하나님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을 기대하며 구경하려고 기다리는 요나에게
4장 6절에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셔서 그늘이 지게 하셨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은 그리 무조건 오냐 오냐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4장 7절에서, 벌레를 준비하시더니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만드셨다. 
그뿐이랴?
4장 8절에서는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셔서 요나의 머리에 죄게 하셨다.
참으로 짓궂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짓궂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면서 한편으론 단순한 요나의 행동을 보라. 

4장 8절에서 요나는 
그 뜨거운 동풍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죽기를 간구한다.
4장 9절에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 박넝쿨로 네가 성내는게 어찌 합당하냐고 따지시자 요나의 대답이 가관이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막말도.. 이정도의 막말이 있을까?
요나는 참으로 단순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니느웨성을 멸망시킨다 하셨으면
반드시 멸망시키셔야 하는거라고 생각했고,
또 죽고 싶다고 말하였지만 
그래도 그늘을 만드는 박넝쿨 하나로 기분 좋다가 벌레가 그 박넝쿨을 씹어버리자
다시 죽여달라고 탄식한다. 

게다가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갈때까지 간다 자기가 성내다 죽을지라도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

반면에 하나님은 짓궂으시면서, 인내하시는 분이다.
박넝쿨 하나로 요나를 웃게 만들었다 다시 울리신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박박 대드는 요나를 끝까지 인내하신다.

4장 10절에서 하나님은 
너는 박넝쿨 하나도 아까워 하면서 
12만명이 살고 있고, 육축도 많이 있는 니느웨성은 왜 아끼지 않느냐며
요나에게 자신의 뜻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단순하고 담대한 요나와 짓궂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한판 승부는
하나님의 K.O. 승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것은 이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것의 차이이다.
우리는 요나의 단순함과 담대함을 욕할 수 있다.

그러나 
요나가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을 바란 것은 사실 
당시대 상황으로 보면 그리 욕먹을 행동은 아니었다.
유대인 요나에게 앗수르는 원수였다. 원수의 멸망을 바라는 심정은 단순했다.
게다가 하나님이 그 멸망을 약속하셨지 않은가?
다시스로 도망하려던 자신을 끝까지 붙드셔서 억지로 니느웨로 끌어다 놓으시고
그 멸망을 예언케하셨다.

그런데 요나의 뒷통수를 치신거다. 니느웨를 멸망치 않으신거다. 
요나의 단순함과 담대함은, 그리 과장되거나 심한 건 아니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요나의 모습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른가?
여자친구와의 이성교제가 잘 안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때로는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이 사업이 잘 안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아무리 내가 생각하기엔 이쪽이 옳고 또 좋아보이는데
그래서 며칠이고 밤새워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반대쪽으로 가라하시면 도저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요나의 단순함과 담대함은 사실 우리 모두의 성정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요나가 하나님을 비꼬았던 그 말대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신 분이시다.

이런 단순하고 담대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며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밝히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런 하나님의 시각을 견지하자. 
사람의 명철이 갖는 한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자.

덧붙여 생각해보건데
이 요나서의 저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재미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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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유니스(Eunice) 2009/05/28 10:19

    이궁...맞아요~ 언제나 인내해주시는 하나님을 더 이상 속상하게 만들지 않아야 하는데...그래서 날마다 회개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속상하게 해드린 나의 생각, 나의 선택들 때문에...^^;;;

    • BlogIcon 야기꾼 2009/06/02 10:09

      어린 조카녀석들을 보노라면, 그 녀석들이 날마다 말썽부리고 사고치고 다니거든요. 그런데 그 녀석들 혼낼 때마다 그녀석들이 울며 잘못했다고 빌어올 때 정말 용서해줄 수 밖에 없더라고요. 우리 하나님은 그 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해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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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요일 아침부터 부모님 밭에 나가 밭일을 하고 온 후유증인지
이틀내내 온몸이 찌뿌둥하게 지내고 있다.
사람이 몸을 쓰고 살아야 하는데, 머리만 쓰는 일을 하다보니
갑자기 몸이 놀랐는가보다.

2. 
월요일 밤 선교훈련을 마치고 대경 전도사와 국수 한 그릇 함께 했다.
사는 이야기, 사역 이야기, 공부 이야기들..
그리고 꿈꾸는 이야기, 비전에 관한 고민들로 더 배불렀던 시간이었다.
학문간의 학제간 연구에 대한 비전을 공유할 수 있었던 시간..
문학과 신학의 경계선을 헤매는 내 모습이나
음악과 신학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대경 전도사나...

둘 다에게 그 공부들이 귀한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3.
화요일엔 총대학원학생회 주최 신학특강인
'유대인의 자화상-피해자에서 가해자로' 2차 강연 '시오니즘'이 잘 마무리되었다.
담당한 학술부장 청의형이 워낙 잘 섬겨주었고
다른 집행부가 모두 열심히 섬겨주어서 잘 끝날 수 있었다.
열강을 하셨던 최창모 교수님, 열정적인 질문과 피드백을 던져주셨던 서강대 신부님
그리고 뒤풀이 저녁을 대접해주신 송순재교수님까지 정말 풍성한 시간이었다.

4.
나이 서른을 넘어서 아직 학생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
내가 이십대의 삶을 살고 있는지 삼십대의 삶에 놓여 있는지 헛갈릴 때가 많다.
이십대 시절에 끝내었어야할 고민을 여전히 끌어잡고 있는 모습이란...
여전히 자라지 못한 내 철없음에 고개를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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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노 2009/06/01 00:09

    나는 어떤 경계선에 서있는걸까요?


    나 명환이예요. ㅎ

    • BlogIcon 야기꾼 2009/06/02 10:14

      목회자의 삶 자체가 경계선에 서 있는 삶 아닐까 싶어요. ^^ '마노'가 명환자매 닉네임인건 이미 알죠. ^^ 들려줘서 고마워요. 자주 들려주시길..^^

  2. BlogIcon 세계개척자 2009/06/08 03:57

    우리가 참 고민 많은 시기이쥐 ^^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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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졸업한 대학 안에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감호라는 이름의 나름 꽤 넓은 호수입니다. 어느 정도 넓으냐면 호수에 얼음이 얼고 눈이 내려 하얗게 덮여 버리면 처음 보는 사람은 왠 운동장이 이리 넓으냐고 오해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막상 그 대학 재학생들은 가끔씩 이 일감호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바쁜 일상이 문제입니다. 학교 생활에 찌들어 살다보면 학교에 일감호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워낙 넓은 학교인지라 강의실과 강의실이 참 넓습니다. 강의와 강의 사이 짧은 10분만에 옮겨다니기엔 벅찬 거리지요. 이 강의실에서 저 강의실로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보면 그 곳에 잔잔한 호수와 그 위를 노니는 오리 때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렇게 눈에 들어온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익숙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2. 
내방 장롱 속 한 구석에 돔브라가 놓여 있습니다. 돔브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전통 현악기입니다. 조그마한 기타를 상상하시면 되는데 단 두 줄의 현을 튕기며 연주하는 악기이지요.  

몇해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반년 정도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올때 한국의 지인들을 위한 이런 저런 선물들 사다가 문득 왜 내 자신을 위한 선물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내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습니다. 비록 연주할 줄도 모르는 악기지만 큰 돈을 주고 이 돔브라를 구입했습니다.

그 악기를 들고서 한국에 왔습니다. 인천공항에 서울까지 오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그 악기만 쳐다보더군요.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사람들 눈초리를 만끽하면서 왠지 우쭐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돔브라가 지금은 내 방 장롱 속 잡동사니와 함께 박혀 있습니다. 장롱을 열때마다 하얗게 먼지가 쌓인 악기를 쳐다보며 생각합니다.

소중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3. 
얼마 전까지 우리 집엔 참 텔레비전이 많았습니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뿐 아니라 각 방마다 가족 수대로 텔리비전이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최소한 채널때문에 가족끼리 다툴 일은 없었지요. 텔레비전이 그렇게 많았던건 우리 가족이 특별히 돈이 많고 사치를 해서가 아닙니다. 누나가 대학시절 따로 자취를 했던 이유입니다. 야기꾼 역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고등학교 정문 앞에 자취방을 마련하면서 텔레비전을 구입했습니다. 교육방송을 듣고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사들였던 텔레비전으로 공부는 안하고 드라마나 연예 프로를 더 보았던 것 같습니다.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 그 텔레비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그 텔레비전과 함께 십여년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함께했지요. 오랜 시간 함께한 텔레비전이였지만 10년을 넘어가면서 조금씩 화면이 불안해지더니 대학을 졸업하기 얼마전 화면이 완전히 나가버리고 그 수명을 다해버렸습니다.

수리를 할 수도 없는 낡은 텔레비전을 동네를 돌아다니던 고물상 아저씨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고철도 쓸래야 쓸 수 없다고, 이런건 돈 주고 사는게 아니라 돈 받고 가저가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아저씨에게 천원짜리 몇장 받고 넘겨버렸습니다.

이제 집에서 내 방에만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볼 시간도 없을 뿐더러 보고 싶은 방송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다운받아보면 되기에, 굳이 텔레비전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십여년을 익숙하게 보냈던  그 텔레비전의 부재가 아무렇지 않은 나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오래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4. 
물건을 소중하게 보관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텔레비전 보다 더 오래 쓴 물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낡은 책상입니다. 이 책상과 언제부터 함께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에 찍은 사진을 보면 이 책상 앞에서 바닥에 발이 닫지도 않는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이 있는걸 보면 20년은 족히 넘었습니다. 이 책상에 앉으면 바닥에 발이 닫지 않고, 손이 책꽂이에 닫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낡아지더군요. 

이 책상 앞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돌아온 밤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것도 이 책상이었습니다. 좋아하던 자매에게 딱지 맞고 한참을 얼굴을 묻고 있던 것도 이 책상이었습니다. 중학교때 못질 몇번 해주었고 고등학교때 내 손으로 페인트칠도 해주고 하면서 20년을 나름대로 튼튼하게 오래 버텨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상과도 이별하는 날이 다가오더군요.  몇 해 전 자취방을 옮기면서 이 책상이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좁은 자취방으로 이사하게 되니 넓다란 책상을 둘 곳이 없었거든요. 결국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고 이 책상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동사무소에 들러 대형 쓰레기 신고를 하고 끊어온 딱지를 책상 위에 붙여서 집 앞에 내다 놓았습니다. 반나절도 채 지나기 전에 사람들이 와서 가져가 버리더군요. 차에 실려 떠나가는 책상을 바라보며 마치 책상과 함께 했던 20여년의 세월과 작별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추억을 공유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 했습니다.

이제 그 책상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좋은 책상 앞에서 이 글을 씁니다. 편한 의자에 앉아서 너무 깨끗해서 매끈하기만 한 책상 위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낡은 책상을 추억하는 나를 보며 생각합니다.

친구같은 존재도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5. 
습관이란게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습관을 무너트리기가 오히려 더 쉬운 것 같습니다.  익숙할 수로 쉽게 잊힌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로 쉽게 습관을 들인다는 것에 망설여지곤 합니다. 오랫동안 익숙하던 것들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멀어져 버렸는데도 또 금새 아무렇지 않게 그 부재의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도 사랑도 내게 그러지 않을까 싶어 두렵습니다. 쉽게 잊히고  쉽게 익숙해져가는 것은 참 두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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