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숨쉬는 책장'에 해당되는 글 17건
- 2010/07/25 거리두기를 배워간다
- 2010/06/25 월드컵과의 질긴 악연에 대하여
- 2010/06/25 아날로그 라이프를 기억하며
- 2009/05/19 익숙할수록 쉽게 잊히는 것들
- 2009/05/14 양소유가 사랑한 여인은?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回頭日欲斜 (회두일욕사)
黃泉無客店 (황천무객점)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울리는 저 북소리 이 내 목숨 재촉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서산 해가 저무는구나
황천가는 길에는 객점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어느 집에서 묵고가리
어린 시절 사육신의 전기에서 읽었던, 성삼문의 한문 시조 한 자락이다. 며칠전 지인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돌아가며 시조나 한 자락씩 읊어보자는 누군가의 뜬금없는 제안을 듣고 불쑥 떠오른게 이 성삼문의 시조였다. 사육신으로서 단종에게 충성과 신의를 다하기 위해 수양대군을 몰아내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사람, 그가 형장으로 가면서 읊었다는 이 시조는 어린 마음에 깊이 박혀와서 부러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끈덕지게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를 않았다.
낭만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이십대 시절에야 그럴듯한 시 몇자락을 읊어주어야 멋있는줄 알았고, 그래서 이 시 저 시 주억거리며 외우고 다닌 적도 있었다. 주로 정호승이나 이정하의 사랑 시들이었고, 어슴푸레 저녁놀이 질 때쯤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를 나지막히 읊조리면 나름 꽤 멋있는줄만 알았다. 머리가 꽤 둔한 편인데, 그래서 수학계산력, 공간지각력 다 꽝이라서 계산치에 길치인 사람인데, 비정상적으로 암기력 하나는 좋은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 암기는 쉽지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아하던 한용운이나 윤동주의 시들을 통째로 외우고 다닌 적도 있고 대학시절엔 중간 기말고사 때면 항상 답안지에 문제를 풀기 전에 암송시 한 편씩 적고 시작하게 하셨던 전공 교수님 덕에 꾸역 꾸역 밀어 넣기도 했지만, 머리 속에 강물이라도 하나 흐르는 듯 시간의 물줄기 속에 쉽사리 쓸려가며 몽땅 잊어버리기 일수였다. 그런데도 어린시절 보았던 이 시조 한자락은 끝끝내 남아서, 이십여년을 훌쩍 넘기는 세월을 머리 속에 자리잡고 떠날 줄을 몰랐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이 시조 한 자락이 그렇게 오랜 시간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이 옳다고 여긴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걸줄 아는 사람, 그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의 목숨까지 모조리 빼앗겨야 했다. 실제 연좌제로 인해 성삼문의 가족들은 어린 세 아들들까지 모두 처형되었다. 사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여인네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야 하는 처참한 현실 속에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형틀에 묶여 끌려가는 자신의 뒤를 눈물로 뒤따르는 어린 딸을 바라보며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의가 짖밟히고 인의가 버림받은 몰상식의 시대 앞에서 과감하게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쳐 일어났던 그였지만, 막상 죽음을 향해 가는 그 길에서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참 뜬금 없게도 서정적인 시조자락이었다는 것이 참 뜬금없었다.
실제 그의 시조 중에는 신념과 절개를 드러내는 시조들도 있었다. 성상문이 죽음을 앞두고 지었다는 시조들은 이 외에도 여럿 더 있는데 대부분 임금을 향한 자신의 절개를 잘 드러내주는 기백어린 시들이었다. 아래의 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시에서 현릉이란 문종이 묻혀있는 능을 말한다. 단종의 아버지 문종이 요절하기 직전에 성삼문 등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하였는데 그 부탁을 잘 따르지 못하는 절탄이 절절이 드러나는 시조이다.
素志平生莫有違 (소지평생막유위)
一死固知忠義在 (일사고지충의재)
顯陵松栢夢依依 (현릉송백몽의의)
임의 밥을 먹으며 입의 옷을 입으며
한 평생 마음 변함없이 살 줄 알았더니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니
현릉의 푸른 송백 꿈 속에선들 잊으리
이 시조 역시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그 책에 함께 실려 있었고 또 함께 외운 것이건만, 내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이런 비장한 시보다는 죽음을 앞둔 시간에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심사를 드러내었던 앞의 시조였다. 시인(詩人)은 천상 관찰자의 숙명을 타고 났음이다. 사물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때로 먼 거리를 유지한채 아무런 감정 없이 사물을 노래하기도 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래서 자기 감정이 줄기 줄기 드러나는 시보다는 담담하게 거리를 둔채로 한 줄 문장 안에 만가지 심사를 담은 시가 더욱 빛나는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그래서 성삼문의 이 시조는 죽음 앞에서, 폭력 앞에서 거리를 둔 채로 죽음을 노래하고 있기에 더욱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다.
한참 피가 뜨거웠던 시절, 나를 붙드는 신념 하나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끝간데 없이 치닫기만 했던 스무살 무렵에는 내 목숨 따위를 걸만한 일들이 참 많이 있었다. 밤을 새워 끄적거린 연서 한장을 고이 품었다가 읽어주고 싶던 여자도 있었고, 내 어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정의도 합리도 없던 기성세대의 모순된 세상도 있었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밤새워 기도하던 신앙의 눈물도 있었다. 그래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랑에 가슴 시렸고, 온 몸으로 부딪혀도 달라지지 않는 세상에 절망했으며, 남들이 들어주지 않는 복음에 애가 탔었다.
그래서 그무렵엔 도저히 '거리두기'를 할 줄 몰랐다. 사랑 앞에, 사람 앞에, 거리에 핀 풀 한포기에도 나는 지나치게 몰두했었고 결국 나의 시마저도 정제되지 못한, 여물지 못한 감정의 편린들이 줄기 줄기 흘러나오곤 했다. 그런 단지 감상의 뇌까림에 지나지 않을 시도 아닌 시들을 끄적거리는 일이 결국에는 한없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결국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시를 끄적거리는, 사랑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는 일들만 한없이 되풀이하며 스물 즈음의 날들을 흘려보냈다.
길었던 방황의 터널을 지나 나이에 'ㄴ'자가 붙어 서른이 되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내 안에 뜨거움이란 단어가 식어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더이상 사랑에 가슴 졸이지 않는, 세상에 맞부딪치기 보다는 멀찌감치 돌아가는 나를 보게 되었다. 한없이 치닫기만하던 사랑은 이내 내 심장에 무수한 상채기들만 남겨버렸고, 그 상채기들로 감정의 핏줄기마저 다 흘려보낸 나의 심장은 이제 점점 굳어간다. 그리고 서서히 나도 '거리두기'를 배워가기 시작한다.
점점 굳어가는 마음이 더 선연하게 느껴질 때면 문득 문득 대학시절 읖조리고 다니던 정호승의 시 '봄 날'을 떠올리곤 한다. 사랑으로 밤새워 끄적거렸던 사랑 노래들도, 밤새워 벗들과 세상을 안주삼아 펼치던 고담준론들도 모두 새 한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듯 세월이란 흐름 속에 지워져갈 뿐이었다. 내가 몸부림치지 않아도 세상은 스스로 아름다웠다. 이제 그 날의 시리던 마음들은 추억이라는 옷으로 갈아 입은 채 새로운 계절 속에서 그저 아름답게 기억될 뿐이다. 눈물 나게 보고 싶던 사람들도,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사람들도 모두 단지 아름다웠을 뿐이다.
세상에 온 몸으로 맞섰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음과 거리를 둘 줄도 알았던 시인 성삼문, 봄 날처럼 언제나 새로운 계절은 돌아오기 마련이건만, 그처럼 살기 보다는 그처럼 죽고 싶었던 치기어린 스무살 청년은 어느새 서른줄을 넘겨버렸고, 아직도 세상과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어설프다.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날들이기에 그 아름다움을 위해 살고 또 죽을수도 있으리라.
봄 날
-정호승-
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친지에 냉이꽃은 하얗게 피었습니다
그 아무도 자기의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천지는 개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코 새 한마리가 자리를 옮겨가는 동안
우리들 인생도 어느새 날이 저물고
까치집도 비에 젖는 밤이 계속되었습니다
내 무덤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의 새똥이 아름다운 봄날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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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관심이 별로 없던 어린시절이었던지라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월드컵은 19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그 여름, 페트병에 차가운 물을 담아서 머리 위에서 계속 쏟아부으면서 공부를 해도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던 그 때, 나는 고3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수학능력시험을 코 앞에 두고 있는 고3이라고 해서 월드컵이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유롭지 못하기에 더 갈급하고, 더 궁금해지는 고3의 월드컵이었다. 대입 공부로 정신이 없던 그 때, 한국과 독일이 맞붙는 경기가 열렸던 것은 어느날 오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학력평가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시험 걱정에 월드컵에 대한 궁금함에 모두 지쳐버렸던 그 날, 교장선생님이 뜻밖의 결정을 내리셨다. 고3 모의고사를 두시간 정도 전체 뒤로 미루고 월드컵 독일전을 시청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이다. 각 반에 놓여있던 커다란 TV 모니터를 켜고 책상을 한데 모아두고는 책상에 적당히 걸쳐 앉아 축구경기를 관람했다. 어설프게나마 볼펜으로 얼굴이나 손목에 태극기를 그려 넣기도 하고,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다. 축구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 역시 그 열기에 자연스레 동참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가 손목에 '필승 16강' 이라고 적혀 있는걸 보면서 왜 우승이 아니라 고작 16강 가지고 목을 매냐고 핀잔을 했을 만큼 축구에 무지했던 나에게도 3대0으로 지던 경기를 3:2까지 몰아붙이는 한국 국가대표를 보면서 축구의 재미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축구의 축자도 모르던 내가 전세계인의 취미생활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3에게, 그것도 유난히 더웠던 그 여름에 더이상의 월드컵을 즐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조금은 삶의 여유가 생기면서 스포츠라는걸 즐길줄 알게 되었다. 우리 대학이 뛰고 있는 대학 야구나 대학 축구 소식도 궁금하게 되고, 황선홍이니 홍명보이니 하는 스타플레이어들에게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르고 1998년 여름이 다가왔을 때, 나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는 신병 교육대에 입소했다. 남들처럼 3년동안 군생활 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출퇴근하는 공익이었지만 한달동안은 신병교육대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내가 입소했던 날이 6월 14일, 그리고 7월 15일인가에 퇴소했다. 바로 월드컵 개막할 때 들어가서 결승전까지 끝나고 나서야 퇴소했다는 이야기다. 어느날 밤 자다가 강제로 깨우는 조교들의 아우성에 연병장으로 뛰쳐나가 밤새 얼차려를 받으면서, 왜 조교들이 저렇게 화가 나 있을까 궁금해 하다가 나중에야 한국 대표팀이 네덜란드에게 5:0으로 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결국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나에게 얼차려의 기억만을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4년이 흘러 2002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도 잊을 수 없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온 거리를 붉게 물드이고 "대한민국" 이라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드높았던 그 여름에, 나는 한국에 없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곳의 대학생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여름엔 마침 선교센터가 새로 이주해서 한참 내부 공사중이었기에, 한국과 폴란드의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던 때, 나와 선교팀원들은 모두 센터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하면 두시간 카작어 수업 말고는 밤 11시 넘어까지 쉬는 시간이라고는 점심시간 20분 밖에 없이 하루종일 공사에 매달렸던 시기였다. 선교사였기에 공사도 선교라는 생각하면 되는데 그래도 월드컵은 정말 보고 싶었다. 우리는 카자흐스탄에 놀러간 것이 아니라 선교하러 갔기에, 축구경기보다는 센터 공사와 선교사역이 더욱 중요하다는 선교팀 대표 선교사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들 입이 댓발은 나왔었지만,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쉴새없이 공사에 매달리던 바쁜 나날이라 다들 어쩔수 없이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나 궁금했다. 벽에서 페인트칠을 벗겨내면서도, 벽돌을 나르면서도 머리 속은 온통 월드컵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에야 속도가 한참 늦은 인터넷을 통해서야 경기 결과를 확인한 우리 선교팀에게 들려온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모두 시내 모처에 모여서 월드컵을 관람했단다. 이럴 수는 없다며, 우리에게도 축구를 보여달라고 대표 선교사님에게 떼를 쓴 결과 2차전인 미국 전에는 우리도 잠깐 짬을 내어 축구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보려던 것이 불발되고 우리 팀끼리 따로 시내 터키 식당에서 터키 방송에서 보여주던 한국과 미국의 경기를 볼 수 있었다. 터키어 뿐이었지만, 그래서 골을 넣은후 오노를 노리고 하던 골 세레머니가 어떤 의미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경기가 끝나고 다시 센터로 돌아가 센터공사를 해야 했지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후의 포르투칼전, 이탈리아전, 스페인전, 그리고 독일전까지 그런 식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그 붉은 열기는 느껴볼 수 없었다. '오 필승 코리아'라는 노래가 있다고 이야기만 들었지 어떤 가사에 어떤 음계인지도 몰랐다. 월드컵 직후 여름 단기선교팀이 카자흐스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역으로, 가이드로, 코디네이터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분주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단기팀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던 공항에서 온통 Be the Reds 빨간 티셔츠를 입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한국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런 이상한 티셔츠를 단기팀 단체 티셔츠로 맞춰 온걸까 의아해 했다. 그만큼 한국의 월드컵 열기에 무지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두고 두고 아쉬운 2002년 월드컵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또 변함없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이젠 2002년의 감동 덕에 완전히 축구에 매료되어버렸다. 2002년 이후로 해외 진출이 잦아진 우리 선수들 덕에 해외리그에 눈돌리게 되었다. 해외에 좋아하는 프로 축구팀도 생겼다. 좋아하는 선수도 생겼다. 조금씩 축구를 알아가면서 유럽에서 축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알게 되면서, 축구 문화사에 관심이 생겼다. 축구 역사에 관련된 자료들을 뒤져가면서 공부도 해봤다. 본래 역사와 문화를 좋아하는 탓에 유럽의 근대사와 현대사가 맞물려 있는 축구 역사는 내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 마침 소위 폐인 양성 게임이라고 이름 높은 Football Manager 게임을 접하게 되면서는 완전히 그 세계에 푹 빠져 버렸다.
그렇게 다시 4년이 흐르고 2006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 2006년 독일 월드컵 역시 내게 그리 좋은 인연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토고와의 첫 경기가 열리던 날 밤, 나는 누나네 치킨 가게 주방에서 통닭을 굽고 있었다. 월드컵 기간이면 대박이 나는 치킨장사 덕에 일손이 딸린 관계로 도울 수 밖에 없었다. 아예 월드컵을 안 보고 안 듣고 지나가면 모를까, 온통 거리에는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고, 홀에서는 손님들 모두 TV 화면에 집중하며 응원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주방까지 들리고 있었다. 주방에서 뜨거운 열기를 참아가며 통닭을 구우면서 홀에서 TV로 축구를 보는 손님들이 내지르는 탄식과 함성을 들으며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2차전과 3차전은 새벽 이른 시간이었던 관계로 통닭을 구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무렵 미국 대학원에 입학허가를 받아놓고 한참 비자서류 준비 중이었던 때였다. 스위스와의 마지막 경기가 있던 전날, 미국 대사관에서 두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비자인터뷰를 받았고,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이유로 비자가 거부되어버렸다. 황당함과 기막힘 속에서 답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밤을 새운 뒤에 본 월드컵이 머리 속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더구나 너무나 아쉽게 져버린 경기였으니 쓰린 속을 더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또 4년이 흘렀다. 눈물을 머금고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다시 그 대학원을 졸업했다. 졸업 이후 다시금 유학을 준비했다가 이번엔 또 장학금 문제로 다시 한번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맞이한채로 또 한번의 월드컵을 맞이했다. 이런 상황이니 이번 월드컵 역시 편한 마음으로 볼 수 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몇번의 월드컵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첫경기 그리스전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았고, 2차전 아르헨티나전은 친구 박진무군의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모여 응원했다. 3차전 나이지리아전은 새벽인 관계로 밤을 홀딱 새운 후 집에서 볼 수 있었다. 경기 직후에 밤샘한 졸려운 눈을 비비며 가족들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편안하게 즐기는 월드컵이 되었다. 더구나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월드컵이니 어찌 아니 기쁠까? 이젠 손목에 16강에 대한 소원을 적어넣던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5:0으로 지고 열받아 우리를 굴리던 신병교육대 조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승패와 상관없이 축구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운 월드컵, 8강도 좋고 4강도 좋지만, 남은 우루과이전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그런 월드컵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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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를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던 넷북 하드가 그만 어제 숨을 멈추었다. 컴퓨터 안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인터넷으로 월드컵 소식도 찾아보지 못하는 답답함에 하루종일 넷북을 뜯어보고, 포맷하고 다시 까는 소동 끝에 겨우 되살려 내었지만, 그만 그간 모아둔 각종 자료와 프로그램, 유틸리티들이 몽땅 사라져버렸다. 하루를 꼬박 보낸 소동 끝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인터넷을 사용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인터넷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조금이라도 궁금한 일들은 검색엔진을 통해 해결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되었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던 90년대 중반만 해도 컴퓨터의 사용이 지금같지 않았다. 리포트 용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보고서를 검은색 테이프로 둘둘 말던 이야기,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밤을 새워 교학처 앞에 줄을 섰다가 수강신청 안내 책자를 뒤적여 가며 4각으로 잘라난 쪽지들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던 이야기 들은 인터넷 사용에 익숙한 지금 대학생들에겐 낯선 이야기일 것이다. 처음 PC 통신을 접했던 시절, 전화접속 모뎀을 통해서 1M 짜리 파일 하나 받으려고 몇 시간을 기다리며, PC통신 때문에 전화통화를 하지 못하는 가족들 눈치를 봐야 했던 때였다. PC 통신을 하면서 처음 PPP 접속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보고, 이메일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고는 학교 후배들에게 무용담처럼 자랑하던 이야기들은 인터넷으로 고화질 동영상을 즐겨보는 요즈음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같을 뿐일게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도,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살았고, 웃었으며 또 즐거워 했었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그 인터넷 없던 시절을 살았던 이들, 가령 나와 같은 90년대 중반 학번들이 군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속속 복학했던 2천년대 초반, 군에서 보낸 3년 사이에 전혀 달라진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포트는 컴퓨터로 프린트해서 제출하고, 수강신청은 인터넷으로만 받았다. VT 기반의 파란 PC 통신 화면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전화번호 주고 받듯이 이메일 주소를 주고 받는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포트 제출을 위해서 도서관 책들을 뒤적거리던 선배들은 모두 졸업해 버렸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료를 긁어다 짜깁기 하는 후배들이 대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험 족보나 필기 노트를 복사하기 위해 공부 잘하는 선배들에게 기웃거리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파일로 된 수업 자료들을 주고 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너무 쉽고 빠르게 세상이 변해버렸다. 변해버린 세상에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던 동기들도 하나 둘 이 인터넷 세상에 적응해 버리고 난뒤엔 정말로 이전의 삶은 우리네 기억 저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변하는 것은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데 광적인 집착이 있는 관계로 어느 교회 주보, 어느 회사의 홍보지, 강의 자료등까지 모조리 스크랩하거나 파일에 철해 두고는 서재에 잔뜩 쌓아두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내 서재 한 구석에 가득찬 이 자료 꾸러미들을 다시 들춰보면 새삼스럽고 귀중한 자료들도 참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이 자료 꾸러미를 더 이상 모으지 않게 되었다. 대신 노트북 안의 폴더 안에 디지털 파일로 변환되어 1기가니 2기가니 하는 용량으로 모여질 뿐이었다. 이전처럼 꾸깃꾸깃한 자료를 바르게 펴서 스크랩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편하게 자료를 모을수 있었고, 가득 싸인 종이 뭉치를 뒤져서 자료를 찾아낼 필요 없이 폴더 검색만으로 순식간에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는 편리함이 있었다. 그렇게 노트북과 인터넷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갔다. 공부를 할 때에도 취미생활 중에도 이 노트북과 인터넷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졌다. 대학원 강의 때에도 노트북으로 사전 프로그램과 유틸리티들을 띄워 놓고 중간 중간 많은 도움을 받는다. 순간 순간 머리 속을 떠돌아 다니는 궁금증은 쉽게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트북의 수명이었다. 워낙 물건을 험하게 다루는 칠칠치 못한 성격 탓에 이 노트북의 수명이 채 일이년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하드라도 날라가는 날에는 그 안에 담겨 있던 수 많은 자료들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었다. 일이년간 꾸준히 모아 놓은 자료들은 방대한 양이어서 그 자료들을 다시 복구하는데 걸리는 노력과 시간은 쉽사리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 한 두 번 그 고초를 겪은 후에는 자연스레 정기적으로 자료들을 백업해 두는 습관이 들었다. 자료들을 집어 넣은 CD들이 수십개가 늘어갈 무렵이 되어 이젠 노트북을 서재에 팽개쳐 두고 넷북을 손에 들게 되었다. ODD가 없는 넷북의 특성상 자료 백업이라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드 파티션을 나눠서 D 폴더 안에 대부분 자료들을 모아두었지만, 간혹 편의성과 시간절약을 위해 바탕화면에 올려둔 자료들도 꽤 되었다. 그리고 그런일들이 결국 어제처럼 날아간 하드와 함께 숱한 자료들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편리함이 때로 의외의 문제를 불러 일으킬 때가 있다. 핸드폰에 저장된 친구들의 전화번호 덕에 더 이상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는 습관도 생겼다. 몇해전인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반년 정도를 생활하다 돌아온 날, 이 습관이 가져온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다. 카자흐스탄 생활 중에는 당연히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었고, 중요한 전화번호들은 수첩에 옮겨 적어두고 있었는데 그만 돌아오기 직전에 이 수첩을 분실한 것이다. 그런데 인천공항에서 나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기로한 친구들과 후배들이 인천공항에 와 있지 않았고, 그네들을 찾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전화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기억나는 전화번호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한시간여를 발을 동동 구르다가 문득 생각난 번호 하나, 아직 핸드폰을 사용하기 이전, 한참 삐삐를 들고다니던 그 시절에, 머리 속에 저장해 두었던 친구녀석 집 전화 번호였다. 친구가 집에 있을리 만무했지만 기억난 번호가 그 하나라 무작정 전화를 해서 부모님께 친구 핸드폰 번호를 여쭈었고, 그 덕에 간신히 통화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익숙한 문명의 이기덕에 잃어버린 것들의 한 단면이었다.
가끔 살아가다 생각나지 않는 기억이 있다. 낮익은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을 때, 머리 속에 검색엔진이라도 하나 있으면 금방 그 기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무리 기억하려 애를 써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 머거리에서 숨어 있을 것 같은 그 기억을 꺼내주는 머릿속 검색엔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은 젊은 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노화가 머리 속부터 오는 것인지 건망증이 한참 심해지고 있으니, 이런 바램은 더욱 짙어만 지고 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쉽게 검색엔진으로 자료를 찾는 편리함에 빠져 어쩌면 나는 자료를 찾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가득 쌓인 종이들을 하나 하나 들춰보면서 새삼 발견하는 옛 자료들에 설레기도 하고, 도서관 한 귀퉁이에 숨어서 낡은 책종이들에서 나는 향기를 맡던 그 즐거움들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살아온듯하다.
가끔은 핸드폰 전원을 꺼버릴 필요가 있다. 가끔은 노트북을 집에 두고 길을 나설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머리 속으로 계속 되내이며 외워볼 필요가 있고, 때론 도서관이나 서점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종이 속으로 머리를 묻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지나온 기억 어느 즈음에 두고 돌아서버린, 잃어버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다면, 갖가지 디지털 이기들 속에 파묻힌 우리네 골치아픈 머리도 가끔은 아날로그의 청량한 바람을 쐬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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