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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回頭日欲斜 (회두일욕사)
黃泉無客店 (황천무객점)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울리는 저 북소리 이 내 목숨 재촉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서산 해가 저무는구나
황천가는 길에는 객점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어느 집에서 묵고가리

    어린 시절 사육신의 전기에서 읽었던, 성삼문의 한문 시조 한 자락이다. 며칠전 지인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돌아가며 시조나 한 자락씩 읊어보자는 누군가의 뜬금없는 제안을 듣고 불쑥 떠오른게 이 성삼문의 시조였다. 사육신으로서 단종에게 충성과 신의를 다하기 위해 수양대군을 몰아내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사람, 그가 형장으로 가면서 읊었다는 이 시조는 어린 마음에 깊이 박혀와서 부러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끈덕지게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를 않았다.

    낭만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이십대 시절에야 그럴듯한 시 몇자락을 읊어주어야 멋있는줄 알았고, 그래서 이 시 저 시 주억거리며 외우고 다닌 적도 있었다. 주로 정호승이나 이정하의 사랑 시들이었고, 어슴푸레 저녁놀이 질 때쯤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를 나지막히 읊조리면 나름 꽤 멋있는줄만 알았다. 머리가 꽤 둔한 편인데, 그래서 수학계산력, 공간지각력 다 꽝이라서 계산치에 길치인 사람인데, 비정상적으로 암기력 하나는 좋은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 암기는 쉽지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아하던 한용운이나 윤동주의 시들을 통째로 외우고 다닌 적도 있고 대학시절엔 중간 기말고사 때면 항상 답안지에 문제를 풀기 전에 암송시 한 편씩 적고 시작하게 하셨던 전공 교수님 덕에 꾸역 꾸역 밀어 넣기도 했지만, 머리 속에 강물이라도 하나 흐르는 듯 시간의 물줄기 속에 쉽사리 쓸려가며 몽땅 잊어버리기 일수였다. 그런데도 어린시절 보았던 이 시조 한자락은 끝끝내 남아서, 이십여년을 훌쩍 넘기는 세월을 머리 속에 자리잡고 떠날 줄을 몰랐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이 시조 한 자락이 그렇게 오랜 시간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이 옳다고 여긴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걸줄 아는 사람, 그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의 목숨까지 모조리 빼앗겨야 했다. 실제 연좌제로 인해 성삼문의 가족들은 어린 세 아들들까지 모두 처형되었다. 사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여인네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야 하는 처참한 현실 속에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형틀에 묶여 끌려가는 자신의 뒤를 눈물로 뒤따르는 어린 딸을 바라보며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의가 짖밟히고 인의가 버림받은 몰상식의 시대 앞에서 과감하게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쳐 일어났던 그였지만, 막상 죽음을 향해 가는 그 길에서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참 뜬금 없게도 서정적인 시조자락이었다는 것이 참 뜬금없었다.



    실제 그의 시조 중에는 신념과 절개를 드러내는 시조들도 있었다. 성상문이 죽음을 앞두고 지었다는 시조들은 이 외에도 여럿 더 있는데 대부분 임금을 향한 자신의 절개를 잘 드러내주는 기백어린 시들이었다. 아래의 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시에서 현릉이란 문종이 묻혀있는 능을 말한다. 단종의 아버지 문종이 요절하기 직전에 성삼문 등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하였는데 그 부탁을 잘 따르지 못하는 절탄이 절절이 드러나는 시조이다.

食人之食衣人衣 (식인지식의인의)
素志平生莫有違
  (소지평생막유위)
一死固知忠義在 
(일사고지충의재)
 顯陵松栢夢依依  (현릉송백몽의의)

임의 밥을 먹으며 입의 옷을 입으며
한 평생 마음 변함없이 살 줄 알았더니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니
현릉의 푸른 송백 꿈 속에선들 잊으리

 
    이 시조 역시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그 책에 함께 실려 있었고 또 함께 외운 것이건만, 내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이런 비장한 시보다는 죽음을 앞둔 시간에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심사를 드러내었던 앞의 시조였다. 시인(詩人)은 천상 관찰자의 숙명을 타고 났음이다. 사물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때로 먼 거리를 유지한채  아무런 감정 없이 사물을 노래하기도 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래서 자기 감정이 줄기 줄기 드러나는 시보다는 담담하게 거리를 둔채로 한 줄 문장 안에 만가지 심사를 담은 시가 더욱 빛나는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그래서 성삼문의 이 시조는 죽음 앞에서, 폭력 앞에서 거리를 둔 채로 죽음을 노래하고 있기에 더욱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다.

    한참 피가 뜨거웠던 시절, 나를 붙드는 신념 하나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끝간데 없이 치닫기만 했던 스무살 무렵에는 내 목숨 따위를 걸만한 일들이 참 많이 있었다. 밤을 새워 끄적거린 연서 한장을 고이 품었다가 읽어주고 싶던 여자도 있었고, 내 어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정의도 합리도 없던 기성세대의 모순된 세상도 있었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밤새워 기도하던 신앙의 눈물도 있었다. 그래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랑에 가슴 시렸고, 온 몸으로 부딪혀도 달라지지 않는 세상에 절망했으며, 남들이 들어주지 않는 복음에 애가 탔었다.
   
    그래서 그무렵엔 도저히 '거리두기'를 할 줄 몰랐다. 사랑 앞에, 사람 앞에, 거리에 핀 풀 한포기에도 나는 지나치게 몰두했었고 결국 나의 시마저도 정제되지 못한, 여물지 못한 감정의 편린들이 줄기 줄기 흘러나오곤 했다. 그런 단지 감상의 뇌까림에 지나지 않을 시도 아닌 시들을 끄적거리는 일이 결국에는 한없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결국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시를 끄적거리는, 사랑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는 일들만 한없이 되풀이하며 스물 즈음의 날들을 흘려보냈다.

    길었던 방황의 터널을 지나 나이에 'ㄴ'자가 붙어 서른이 되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내 안에 뜨거움이란 단어가 식어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더이상 사랑에 가슴 졸이지 않는, 세상에 맞부딪치기 보다는 멀찌감치 돌아가는 나를 보게 되었다. 한없이 치닫기만하던 사랑은 이내 내 심장에 무수한 상채기들만 남겨버렸고, 그 상채기들로 감정의 핏줄기마저 다 흘려보낸 나의 심장은 이제 점점 굳어간다. 그리고 서서히 나도 '거리두기'를 배워가기 시작한다.

    점점 굳어가는 마음이 더 선연하게 느껴질 때면 문득 문득 대학시절 읖조리고 다니던 정호승의 시 '봄 날'을 떠올리곤 한다. 사랑으로 밤새워 끄적거렸던 사랑 노래들도, 밤새워 벗들과 세상을 안주삼아 펼치던 고담준론들도 모두 새 한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듯 세월이란 흐름 속에 지워져갈 뿐이었다. 내가 몸부림치지 않아도 세상은 스스로 아름다웠다. 이제 그 날의 시리던 마음들은 추억이라는 옷으로 갈아 입은 채 새로운 계절 속에서 그저 아름답게 기억될 뿐이다. 눈물 나게 보고 싶던 사람들도,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사람들도 모두 단지 아름다웠을 뿐이다.

    세상에 온 몸으로 맞섰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음과 거리를 둘 줄도 알았던 시인 성삼문, 봄 날처럼 언제나 새로운 계절은 돌아오기 마련이건만, 그처럼 살기 보다는 그처럼 죽고 싶었던 치기어린 스무살 청년은 어느새 서른줄을 넘겨버렸고, 아직도 세상과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어설프다.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날들이기에 그 아름다움을 위해 살고 또 죽을수도 있으리라.



봄   날 

                                                          -정호승-

 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친지에 냉이꽃은 하얗게 피었습니다

그 아무도 자기의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천지는 개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코 새 한마리가 자리를 옮겨가는 동안

 우리들 인생도 어느새 날이 저물고
까치집도 비에 젖는 밤이 계속되었습니다 

내 무덤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의 새똥이 아름다운 봄날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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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에 한번, 온 국민이 모두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시간이 있다. 축구공 하나에 모두가 열광하고 모두가 탄식하게 만드는 전 세계가 축구공 하나로 즐거운 축제, 바로 월드컵이다. 딱히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축구문화사에 관심이 많은 관계로 주요 축구 리그 소식들에 목말라하고 국가대표들이 맞붙는 A 매치때마다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치는 사람중 하나로서 이 월드컵이 참으로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월드컵과 나는 인연이 좋지 못하다.

    축구에 관심이 별로 없던 어린시절이었던지라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월드컵은 19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그 여름, 페트병에 차가운 물을 담아서 머리 위에서 계속 쏟아부으면서 공부를 해도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던 그 때, 나는 고3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수학능력시험을 코 앞에 두고 있는 고3이라고 해서 월드컵이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유롭지 못하기에 더 갈급하고, 더 궁금해지는 고3의 월드컵이었다. 대입 공부로 정신이 없던 그 때, 한국과 독일이 맞붙는 경기가 열렸던 것은 어느날 오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학력평가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시험 걱정에 월드컵에 대한 궁금함에 모두 지쳐버렸던 그 날, 교장선생님이 뜻밖의 결정을 내리셨다. 고3 모의고사를 두시간 정도 전체 뒤로 미루고 월드컵 독일전을 시청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이다. 각 반에 놓여있던 커다란 TV 모니터를 켜고 책상을 한데 모아두고는 책상에 적당히 걸쳐 앉아 축구경기를 관람했다. 어설프게나마 볼펜으로 얼굴이나 손목에 태극기를 그려 넣기도 하고,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다. 축구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 역시 그 열기에 자연스레 동참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가 손목에 '필승 16강' 이라고 적혀 있는걸 보면서 왜 우승이 아니라 고작 16강 가지고 목을 매냐고 핀잔을 했을 만큼 축구에 무지했던 나에게도 3대0으로 지던 경기를 3:2까지 몰아붙이는 한국 국가대표를 보면서 축구의 재미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축구의 축자도 모르던 내가 전세계인의 취미생활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3에게, 그것도 유난히 더웠던 그 여름에 더이상의 월드컵을 즐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조금은 삶의 여유가 생기면서 스포츠라는걸 즐길줄 알게 되었다. 우리 대학이 뛰고 있는 대학 야구나 대학 축구 소식도 궁금하게 되고, 황선홍이니 홍명보이니 하는 스타플레이어들에게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르고 1998년 여름이 다가왔을 때, 나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는 신병 교육대에 입소했다. 남들처럼 3년동안 군생활 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출퇴근하는 공익이었지만 한달동안은 신병교육대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내가 입소했던 날이 6월 14일, 그리고 7월 15일인가에 퇴소했다. 바로 월드컵 개막할 때 들어가서 결승전까지 끝나고 나서야 퇴소했다는 이야기다. 어느날 밤 자다가 강제로 깨우는 조교들의 아우성에 연병장으로 뛰쳐나가 밤새 얼차려를 받으면서, 왜 조교들이 저렇게 화가 나 있을까 궁금해 하다가 나중에야 한국 대표팀이 네덜란드에게 5:0으로 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결국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나에게 얼차려의 기억만을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나름 공익으로 몇년간 출퇴근 잘 한 뒤에, 대학에 복학했다. 고전소설 강의를 위해 발제를 준비하며 접하게된 PC게임에 푹 빠져버렸던 내게 유난히 재미있게 다가온 것이 축구 게임이었다. 게임상에서지만, 축구팀을 직접 감독하며 경기해보는 것은 묘한 재미가 있었다. 게임을 통해서 조금씩 해외 스타 플레이어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로이 킨이나 호나우도, 로베르토 카를로스 같은 선수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입을 벌리던 평범한 축구팬의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4년이 흘러 2002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도 잊을 수 없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온 거리를 붉게 물드이고 "대한민국" 이라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드높았던 그 여름에, 나는 한국에 없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곳의 대학생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여름엔 마침 선교센터가 새로 이주해서 한참 내부 공사중이었기에, 한국과 폴란드의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던 때, 나와 선교팀원들은 모두 센터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하면 두시간 카작어 수업 말고는 밤 11시 넘어까지 쉬는 시간이라고는 점심시간 20분 밖에 없이 하루종일 공사에 매달렸던 시기였다. 선교사였기에 공사도 선교라는 생각하면 되는데 그래도 월드컵은 정말 보고 싶었다. 우리는 카자흐스탄에 놀러간 것이 아니라 선교하러 갔기에, 축구경기보다는 센터 공사와 선교사역이 더욱 중요하다는 선교팀 대표 선교사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들 입이 댓발은 나왔었지만,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쉴새없이 공사에 매달리던 바쁜 나날이라 다들 어쩔수 없이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나 궁금했다. 벽에서 페인트칠을 벗겨내면서도, 벽돌을 나르면서도 머리 속은 온통 월드컵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에야 속도가 한참 늦은 인터넷을 통해서야 경기 결과를 확인한 우리 선교팀에게 들려온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모두 시내 모처에 모여서 월드컵을 관람했단다. 이럴 수는 없다며, 우리에게도 축구를 보여달라고 대표 선교사님에게 떼를 쓴 결과 2차전인 미국 전에는 우리도 잠깐 짬을 내어 축구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보려던 것이 불발되고 우리 팀끼리 따로 시내 터키 식당에서 터키 방송에서 보여주던 한국과 미국의 경기를 볼 수 있었다. 터키어 뿐이었지만, 그래서 골을 넣은후 오노를 노리고 하던 골 세레머니가 어떤 의미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경기가 끝나고 다시 센터로 돌아가 센터공사를 해야 했지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후의 포르투칼전, 이탈리아전, 스페인전, 그리고 독일전까지 그런 식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그 붉은 열기는 느껴볼 수 없었다. '오 필승 코리아'라는 노래가 있다고 이야기만 들었지 어떤 가사에 어떤 음계인지도 몰랐다. 월드컵 직후 여름 단기선교팀이 카자흐스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역으로, 가이드로, 코디네이터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분주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단기팀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던 공항에서 온통 Be the Reds 빨간 티셔츠를 입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한국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런 이상한 티셔츠를 단기팀 단체 티셔츠로 맞춰 온걸까 의아해 했다. 그만큼 한국의 월드컵 열기에 무지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두고 두고 아쉬운 2002년 월드컵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또 변함없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이젠 2002년의 감동 덕에 완전히 축구에 매료되어버렸다. 2002년 이후로 해외 진출이 잦아진 우리 선수들 덕에 해외리그에 눈돌리게 되었다. 해외에 좋아하는 프로 축구팀도 생겼다. 좋아하는 선수도 생겼다. 조금씩 축구를 알아가면서 유럽에서 축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알게 되면서, 축구 문화사에 관심이 생겼다. 축구 역사에 관련된 자료들을 뒤져가면서 공부도 해봤다. 본래 역사와 문화를 좋아하는 탓에 유럽의 근대사와 현대사가 맞물려 있는 축구 역사는 내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 마침 소위 폐인 양성 게임이라고 이름 높은 Football Manager 게임을 접하게 되면서는 완전히 그 세계에 푹 빠져 버렸다.

    그렇게 다시 4년이 흐르고 2006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 2006년 독일 월드컵 역시 내게 그리 좋은 인연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토고와의 첫 경기가 열리던 날 밤, 나는 누나네 치킨 가게 주방에서 통닭을 굽고 있었다. 월드컵 기간이면 대박이 나는 치킨장사 덕에 일손이 딸린 관계로 도울 수 밖에 없었다. 아예 월드컵을 안 보고 안 듣고 지나가면 모를까, 온통 거리에는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고, 홀에서는 손님들 모두 TV 화면에 집중하며 응원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주방까지 들리고 있었다. 주방에서 뜨거운 열기를 참아가며 통닭을 구우면서 홀에서 TV로 축구를 보는 손님들이 내지르는 탄식과 함성을 들으며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2차전과 3차전은 새벽 이른 시간이었던 관계로 통닭을 구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무렵 미국 대학원에 입학허가를 받아놓고 한참 비자서류 준비 중이었던 때였다. 스위스와의 마지막 경기가 있던 전날, 미국 대사관에서 두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비자인터뷰를 받았고,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이유로 비자가 거부되어버렸다. 황당함과 기막힘 속에서 답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밤을 새운 뒤에 본 월드컵이 머리 속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더구나 너무나 아쉽게 져버린 경기였으니 쓰린 속을 더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또 4년이 흘렀다. 눈물을 머금고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다시 그 대학원을 졸업했다. 졸업 이후 다시금 유학을 준비했다가 이번엔 또 장학금 문제로 다시 한번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맞이한채로  또 한번의 월드컵을 맞이했다. 이런 상황이니 이번 월드컵 역시 편한 마음으로 볼 수 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몇번의 월드컵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첫경기 그리스전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았고, 2차전 아르헨티나전은 친구 박진무군의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모여 응원했다. 3차전 나이지리아전은 새벽인 관계로 밤을 홀딱 새운 후 집에서 볼 수 있었다. 경기 직후에 밤샘한 졸려운 눈을 비비며 가족들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편안하게 즐기는 월드컵이 되었다. 더구나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월드컵이니 어찌 아니 기쁠까? 이젠 손목에 16강에 대한 소원을 적어넣던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5:0으로 지고 열받아 우리를 굴리던 신병교육대 조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승패와 상관없이 축구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운 월드컵, 8강도 좋고 4강도 좋지만, 남은 우루과이전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그런 월드컵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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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여를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던 넷북 하드가 그만 어제 숨을 멈추었다. 컴퓨터 안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인터넷으로 월드컵 소식도 찾아보지 못하는 답답함에 하루종일 넷북을 뜯어보고, 포맷하고 다시 까는 소동 끝에 겨우 되살려 내었지만, 그만 그간 모아둔 각종 자료와 프로그램, 유틸리티들이 몽땅 사라져버렸다. 하루를 꼬박 보낸 소동 끝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인터넷을 사용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인터넷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조금이라도 궁금한 일들은 검색엔진을 통해 해결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되었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던 90년대 중반만 해도 컴퓨터의 사용이 지금같지 않았다. 리포트 용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보고서를 검은색 테이프로 둘둘 말던 이야기,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밤을 새워 교학처 앞에 줄을 섰다가 수강신청 안내 책자를 뒤적여 가며 4각으로 잘라난 쪽지들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던 이야기 들은 인터넷 사용에 익숙한 지금 대학생들에겐 낯선 이야기일 것이다. 처음 PC 통신을 접했던 시절, 전화접속 모뎀을 통해서 1M 짜리 파일 하나 받으려고 몇 시간을 기다리며, PC통신 때문에 전화통화를 하지 못하는 가족들 눈치를 봐야 했던 때였다. PC 통신을 하면서 처음 PPP 접속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보고, 이메일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고는 학교 후배들에게 무용담처럼 자랑하던 이야기들은 인터넷으로 고화질 동영상을 즐겨보는 요즈음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같을 뿐일게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도,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살았고, 웃었으며 또 즐거워 했었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그 인터넷 없던 시절을 살았던 이들, 가령 나와 같은 90년대 중반 학번들이 군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속속 복학했던 2천년대 초반, 군에서 보낸 3년 사이에 전혀 달라진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포트는 컴퓨터로 프린트해서 제출하고, 수강신청은 인터넷으로만 받았다. VT 기반의 파란 PC 통신 화면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전화번호 주고 받듯이 이메일 주소를 주고 받는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포트 제출을 위해서 도서관 책들을 뒤적거리던 선배들은 모두 졸업해 버렸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료를 긁어다 짜깁기 하는 후배들이 대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험 족보나 필기 노트를 복사하기 위해 공부 잘하는 선배들에게 기웃거리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파일로 된 수업 자료들을 주고 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너무 쉽고 빠르게 세상이 변해버렸다. 변해버린 세상에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던 동기들도 하나 둘 이 인터넷 세상에 적응해 버리고 난뒤엔 정말로 이전의 삶은 우리네 기억 저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변하는 것은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데 광적인 집착이 있는 관계로 어느 교회 주보, 어느 회사의 홍보지, 강의 자료등까지 모조리 스크랩하거나 파일에 철해 두고는 서재에 잔뜩 쌓아두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내 서재 한 구석에 가득찬 이 자료 꾸러미들을 다시 들춰보면 새삼스럽고 귀중한 자료들도 참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이 자료 꾸러미를 더 이상 모으지 않게 되었다. 대신 노트북 안의 폴더 안에 디지털 파일로 변환되어 1기가니 2기가니 하는 용량으로 모여질 뿐이었다. 이전처럼 꾸깃꾸깃한 자료를 바르게 펴서 스크랩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편하게 자료를 모을수 있었고, 가득 싸인 종이 뭉치를 뒤져서 자료를 찾아낼 필요 없이 폴더 검색만으로 순식간에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는 편리함이 있었다. 그렇게 노트북과 인터넷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갔다. 공부를 할 때에도 취미생활 중에도 이 노트북과 인터넷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졌다. 대학원 강의 때에도 노트북으로 사전 프로그램과 유틸리티들을 띄워 놓고 중간 중간 많은 도움을 받는다. 순간 순간 머리 속을 떠돌아 다니는 궁금증은 쉽게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트북의 수명이었다. 워낙 물건을 험하게 다루는 칠칠치 못한 성격 탓에 이 노트북의 수명이 채 일이년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하드라도 날라가는 날에는 그 안에 담겨 있던 수 많은 자료들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었다. 일이년간 꾸준히 모아 놓은 자료들은 방대한 양이어서 그 자료들을 다시 복구하는데 걸리는 노력과 시간은 쉽사리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 한 두 번 그 고초를 겪은 후에는 자연스레 정기적으로 자료들을 백업해 두는 습관이 들었다. 자료들을 집어 넣은 CD들이 수십개가 늘어갈 무렵이 되어 이젠 노트북을 서재에 팽개쳐 두고 넷북을 손에 들게 되었다. ODD가 없는 넷북의 특성상 자료 백업이라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드 파티션을 나눠서 D 폴더 안에 대부분 자료들을 모아두었지만, 간혹 편의성과 시간절약을 위해 바탕화면에 올려둔 자료들도 꽤 되었다. 그리고 그런일들이 결국 어제처럼 날아간 하드와 함께 숱한 자료들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편리함이 때로 의외의 문제를 불러 일으킬 때가 있다. 핸드폰에 저장된 친구들의 전화번호 덕에 더 이상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는 습관도 생겼다. 몇해전인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반년 정도를 생활하다 돌아온 날, 이 습관이 가져온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다. 카자흐스탄 생활 중에는 당연히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었고, 중요한 전화번호들은 수첩에 옮겨 적어두고 있었는데 그만 돌아오기 직전에 이 수첩을 분실한 것이다. 그런데 인천공항에서 나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기로한 친구들과 후배들이 인천공항에 와 있지 않았고, 그네들을 찾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전화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기억나는 전화번호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한시간여를 발을 동동 구르다가 문득 생각난 번호 하나, 아직 핸드폰을 사용하기 이전, 한참 삐삐를 들고다니던 그 시절에, 머리 속에 저장해 두었던 친구녀석 집 전화 번호였다. 친구가 집에 있을리 만무했지만 기억난 번호가 그 하나라 무작정 전화를 해서 부모님께 친구 핸드폰 번호를 여쭈었고, 그 덕에 간신히 통화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익숙한 문명의 이기덕에 잃어버린 것들의 한 단면이었다.                                                                 

  
   가끔 살아가다 생각나지 않는 기억이 있다. 낮익은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을 때, 머리 속에 검색엔진이라도 하나 있으면 금방 그 기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무리 기억하려 애를 써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 머거리에서 숨어 있을 것 같은 그 기억을 꺼내주는 머릿속 검색엔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은 젊은 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노화가 머리 속부터 오는 것인지 건망증이 한참 심해지고 있으니, 이런 바램은 더욱 짙어만 지고 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쉽게 검색엔진으로 자료를 찾는 편리함에 빠져 어쩌면 나는 자료를 찾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가득 쌓인 종이들을 하나 하나 들춰보면서 새삼 발견하는 옛 자료들에 설레기도 하고, 도서관 한 귀퉁이에 숨어서 낡은 책종이들에서 나는 향기를 맡던 그 즐거움들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살아온듯하다.



    가끔은 핸드폰 전원을 꺼버릴 필요가 있다. 가끔은 노트북을 집에 두고 길을 나설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머리 속으로 계속 되내이며 외워볼 필요가 있고, 때론 도서관이나 서점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종이 속으로 머리를 묻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지나온 기억 어느 즈음에 두고 돌아서버린, 잃어버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다면, 갖가지 디지털 이기들 속에 파묻힌 우리네 골치아픈 머리도 가끔은 아날로그의 청량한 바람을 쐬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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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졸업한 대학 안에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감호라는 이름의 나름 꽤 넓은 호수입니다. 어느 정도 넓으냐면 호수에 얼음이 얼고 눈이 내려 하얗게 덮여 버리면 처음 보는 사람은 왠 운동장이 이리 넓으냐고 오해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막상 그 대학 재학생들은 가끔씩 이 일감호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바쁜 일상이 문제입니다. 학교 생활에 찌들어 살다보면 학교에 일감호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워낙 넓은 학교인지라 강의실과 강의실이 참 넓습니다. 강의와 강의 사이 짧은 10분만에 옮겨다니기엔 벅찬 거리지요. 이 강의실에서 저 강의실로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보면 그 곳에 잔잔한 호수와 그 위를 노니는 오리 때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렇게 눈에 들어온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익숙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2. 
내방 장롱 속 한 구석에 돔브라가 놓여 있습니다. 돔브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전통 현악기입니다. 조그마한 기타를 상상하시면 되는데 단 두 줄의 현을 튕기며 연주하는 악기이지요.  

몇해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반년 정도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올때 한국의 지인들을 위한 이런 저런 선물들 사다가 문득 왜 내 자신을 위한 선물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내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습니다. 비록 연주할 줄도 모르는 악기지만 큰 돈을 주고 이 돔브라를 구입했습니다.

그 악기를 들고서 한국에 왔습니다. 인천공항에 서울까지 오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그 악기만 쳐다보더군요.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사람들 눈초리를 만끽하면서 왠지 우쭐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돔브라가 지금은 내 방 장롱 속 잡동사니와 함께 박혀 있습니다. 장롱을 열때마다 하얗게 먼지가 쌓인 악기를 쳐다보며 생각합니다.

소중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3. 
얼마 전까지 우리 집엔 참 텔레비전이 많았습니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뿐 아니라 각 방마다 가족 수대로 텔리비전이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최소한 채널때문에 가족끼리 다툴 일은 없었지요. 텔레비전이 그렇게 많았던건 우리 가족이 특별히 돈이 많고 사치를 해서가 아닙니다. 누나가 대학시절 따로 자취를 했던 이유입니다. 야기꾼 역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고등학교 정문 앞에 자취방을 마련하면서 텔레비전을 구입했습니다. 교육방송을 듣고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사들였던 텔레비전으로 공부는 안하고 드라마나 연예 프로를 더 보았던 것 같습니다.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 그 텔레비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그 텔레비전과 함께 십여년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함께했지요. 오랜 시간 함께한 텔레비전이였지만 10년을 넘어가면서 조금씩 화면이 불안해지더니 대학을 졸업하기 얼마전 화면이 완전히 나가버리고 그 수명을 다해버렸습니다.

수리를 할 수도 없는 낡은 텔레비전을 동네를 돌아다니던 고물상 아저씨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고철도 쓸래야 쓸 수 없다고, 이런건 돈 주고 사는게 아니라 돈 받고 가저가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아저씨에게 천원짜리 몇장 받고 넘겨버렸습니다.

이제 집에서 내 방에만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볼 시간도 없을 뿐더러 보고 싶은 방송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다운받아보면 되기에, 굳이 텔레비전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십여년을 익숙하게 보냈던  그 텔레비전의 부재가 아무렇지 않은 나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오래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4. 
물건을 소중하게 보관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텔레비전 보다 더 오래 쓴 물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낡은 책상입니다. 이 책상과 언제부터 함께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에 찍은 사진을 보면 이 책상 앞에서 바닥에 발이 닫지도 않는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이 있는걸 보면 20년은 족히 넘었습니다. 이 책상에 앉으면 바닥에 발이 닫지 않고, 손이 책꽂이에 닫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낡아지더군요. 

이 책상 앞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돌아온 밤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것도 이 책상이었습니다. 좋아하던 자매에게 딱지 맞고 한참을 얼굴을 묻고 있던 것도 이 책상이었습니다. 중학교때 못질 몇번 해주었고 고등학교때 내 손으로 페인트칠도 해주고 하면서 20년을 나름대로 튼튼하게 오래 버텨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상과도 이별하는 날이 다가오더군요.  몇 해 전 자취방을 옮기면서 이 책상이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좁은 자취방으로 이사하게 되니 넓다란 책상을 둘 곳이 없었거든요. 결국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고 이 책상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동사무소에 들러 대형 쓰레기 신고를 하고 끊어온 딱지를 책상 위에 붙여서 집 앞에 내다 놓았습니다. 반나절도 채 지나기 전에 사람들이 와서 가져가 버리더군요. 차에 실려 떠나가는 책상을 바라보며 마치 책상과 함께 했던 20여년의 세월과 작별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추억을 공유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 했습니다.

이제 그 책상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좋은 책상 앞에서 이 글을 씁니다. 편한 의자에 앉아서 너무 깨끗해서 매끈하기만 한 책상 위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낡은 책상을 추억하는 나를 보며 생각합니다.

친구같은 존재도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5. 
습관이란게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습관을 무너트리기가 오히려 더 쉬운 것 같습니다.  익숙할 수로 쉽게 잊힌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로 쉽게 습관을 들인다는 것에 망설여지곤 합니다. 오랫동안 익숙하던 것들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멀어져 버렸는데도 또 금새 아무렇지 않게 그 부재의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도 사랑도 내게 그러지 않을까 싶어 두렵습니다. 쉽게 잊히고  쉽게 익숙해져가는 것은 참 두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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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운몽을 처음 접한 것은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갖 사랑이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할 사춘기 무렵의 소년에게 구운몽의 여덟가지 사랑 이야기는 며칠밤을 새우며 읽어낼 정도로 부럽고 가슴떨리는 이야기였지요. 진채봉과 사랑을 나누는 시 '양류사', 양소유가 변장하고 정경패를 만나는 장면 같은 내용들은 읽고 또 읽어도 도저히 가시지 않는 여운이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구운몽에 관하여 발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내 고전문학 탐독의 첫 시작과 같은 책이 구운몽이었기에, 학기초 발제를 정할 때부터 당연히 구운몽을 하겠노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지요. 내가 얼마나 구운몽을 좋아했는지 잘 아시던 신동흔 선생님께서 감사하게도 제게 구운몽 발제를 맏겨 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구운몽을 처음 읽었던 중학생 시절의 눈으로 되돌아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진짜 문학을 감상한다는 것은 몇편의 논문을 짜깁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조리며 읽는 어린 감수성에 있다고 강하게 믿으면서 이 발제문을 준비했었지요. 덕분에 다른 여러 이야기는 생략된채, 양소유와 여덟 여인의 사랑 이야기에만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대학 강의 시간에 이런 따위의 발제를 했었다니요. 신경 써주셔서 구운몽 발제를 맏겨주셨던 신동흔 선생님이나, 같은 클래스에 참여했던 학우들에게 이런 황당 발제로 인해서 무척 미안해지기도 하네요.




"불멸의 연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음악가 베토벤이 죽은 뒤에, 베토벤이 정말로 사랑했던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그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돌아보며 추적해가는 영화였다. 이 영화 의 방식을 차용해서, 양소유의 일생과 사랑을 추적하며 양소유의 사랑 방식과 그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은 누구였는가를 주제로 삼기로 했다. 

이를 위하여 주인공 성진 양소유와 여덟명의 여인의 캐릭터를 먼저 살펴보아 이들의 성격이 어떠하였는지를 밝혀 그들의 사랑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성진, 양소유

- 성진 -
일대기 : 남악 형성 연화봉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려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참석하였다. 이에 육관대사는 제자 성진(性眞)을 보내 용왕에게 사례하도록 했는데, 용왕의 술대접을 받고 돌아오던 성신은 형산 선녀 위부인의 팔 선녀와 석교에서 만나 서로 희롱한다. 선방(禪房)에 돌아온 성진은 팔 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佛門)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 영화를 원하다가 팔 선녀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추방된다. 후에 인생을 마치고 귀환한다.

- 양소유 -
일대기 : 희남 수주현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난 양소유는 16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한림학사로 있을 때, 글로써 조와 위를 굴복 시켰고, 연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연왕을 직접 만나 역시 굴복시켰다. 이공으로 예부상서에 까지 올랐다. 토번이 난을 일으키자, 대원수가 되어 이를 물리치고 승상에 오른다. 

-> 사랑 이야기를 뺀 양소유의 삶은 별다른 굴곡 없이 평탄하고 재미 없는 삶이었다.

인물됨 : - 두진인의 증언
"양선생의 눈썹이 매우 빼어나 귀앞머리를 향하였으니 응당 벼슬이 삼태(三台)에 오를 것이요, 귓둘래가 구슬 같고 희기가 분칠한 듯하니 이름이 천하에 들릴 것이요, 권세의 골격이 얼굴에 갇그하니 군병을 잡은 위력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진정시킬 것이오, 만리의 땅에 봉후할 것이니 백 가지 일에 흠이 없을 것 입니다."

2. 여덟 여인

  1) 진채봉 - 제 3부인 

특징 :진채봉은 양소유의 첫사랑이라고 할수 있다. 화주 진어사의 딸로서, 글 솜씨가 뛰어나다. 아버지 진어사가 반역죄로 몰리는 바람에, 노비로 전락하는 고초를 당했고, 곧 예쁜 외모 덕에 황궁에 들어왔고, 황후의 극진한 총애를 받게 된다. 글솜씨가 뛰어나 여중서가 되어 궁중의 문서를 맡아보는 일을 하였고, 난양공주가 그 재주를 매우 사랑하여 정이 골육과 같아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하였다. 

외모 : 양소유가 처음 진채봉을 만났을때의 묘사이다.
"그 미인의 구름 같은 머리가 귀밑까지 드리웠고 옥비녀는 반쯤 기울어졌으며 아직 봄잠이 부족해 하는 모습이 하도 천연스럽게 아름다워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고 비슷하게조차 그릴 수 없었다."

양소유와의 사랑 -
양소유가 15세 되어 과거를 보러 향하는 도중 무성한 수양버들 사이로 작은 누각이 는 아름다운 곳을 발견하고는 그 곳에서 버드나무를 예찬하는 시 한수를 지어 읊었다. 그 때 누각 안에는 마침 아름다운 여인이 자고 있었다. 소유의 시 읊는 소리에 여인은 잠에서 깨어 창을 열고 난간에 의지하여 섰다가 소유와 눈이 마주쳤다. 이 여자가 바로 진채봉이다. 소유의 시를 사모하게된 진채봉은 시 한편을 써 유모를 통해 소유에게 전달하였고, 소유 역시 답시를 적어 그 마음을 받았고 둘은 혼인을 약속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학작품에서 그러하듯이, 세상은 이 둘의 사랑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전란이 일어나고 전쟁이 참화가 지나간 뒤, 양소유가 진채봉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모습은 간데 없고, 진채봉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노비로 전락했다는 소식만을 듣게 된다. 서로 소식을 몰라 죽은줄로만 알았다가, 소유가 과거에 급제하여 천자와 더불어 여러 여중서들에게 시를 지어 주었을 때 그가 전일의 약혼자임을 알게 되고, 난양이 소유에게 시집 갈 때 잉첩으로 따라서 소유에게 왔다.

  2) 계섬월 - 제5부인

특징 : 적경홍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명기로 알려진 기생이었다. 진채봉과는 진어사가 낙양에서 벼슬할 때 서로 사랑하며 아끼던 사이였다. 진채봉이나 적경홍과의 친분, 그리고 정경패를 양소유에게 천거하는 등의 모습으로 보아 재능있는 여자들을 두루 사귀어 인간관계가 좋고 특별히 양소유의 사랑을 얻는데 있어 시기심도 없는듯 하다. 자신은 기생이기에 첩실 신분 뿐임을 잘 알기에 정경패를 정실로 추천할 정도로 현실적인 면도 있다.

외모 : 양소유가 처음 만났을 때, 
"양생이 눈을 들어 모든 창녀를 보니 이십여 인이 모두가 맡은 바가 있었지만 한 사람만이 홀로 단정히 앉았는데, 용모가 아름다워 참으로 국색이어서 마치 요대 선녀가 인간세상에 내려온 듯 하였다."

양소유와의 사랑 -
전란으로 인해 과거가 다음해 봄으로 연기된다. 소유는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옛 서울 낙양에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술집으로 비를 피한다. 마침 그 곳에서는 여러 소년들이 시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양소유 역시 그 자리에서 시를 적어 다른 소년들의 시를 누르게 되었다. 이 자리에는 당대 최고의 기생으로 유명하던 계섬월이 있었고, 계섬월은 양소유의 시에 반한 계섬월은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셔 연분을 맺게 된다. 계섬월은 소유에게 정경패를 추천한다.

  3) 정경패 - 제 1부인

특징 : 사도의 딸이지만 황후의 양녀가 되어 영양공주로 봉해졌다. 음율과 가락에 조예가 깊고, 재기와 기지가 넘친다. 시비 가춘운과는 친자매처럼 자랐고, 서로 말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읽을 정도이다. 자존심이 강해 양소유에게 속은 것을 분하게 여기며 복수한다.

외모 : 양소유가 처음 만났을 때
"태양이 아침에 솟아 오른 듯, 연꽃이 물이 비꼈는 듯,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아찔하여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양소유와의 사랑 -
계섬월의 추천을 받은 양소유는 꾀를 내어 여관(女冠)으로 변장하고 정사도의 집에 찾아간다. 정사도 부부와 정경패 앞에서 여러 노래들을 연주하다가 마지막 아홉번째 봉구황을 연주한다. 봉구황은 사마상여가 탁문군의 마음을 도드리던 곡이었다. 이 곡을 듣고서 바로 소유가 여자가 아닌 남자임을 간파한다. 후에 양소유가 과거에 장원하고 정사도의 사위가 되자, 전에 속은 일을 분하게 여기며 가춘운을 귀신으로 만들어 복수를 한다. 소유가 난양의 부마로 간택되자, 시비 가춘운과 더불어 평생 독신으로 살 작정을 한다. 난양의 덕택으로 황후의 양녀가 되어 영양공주로 책봉되고 양소유의 제1부인이 된다.

  4) 가춘운 - 제 4부인

특징 : 정사도 집안의 시녀였지만 여러서부터 정경패와 함께 자라며 친자매처럼 다정하다. 친자매 같은 정경패가 양소유에게 시집가게 되자, 정경패와 한 남편을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을 품는다. 

외모 : 양소유의 첫인상
"양생이 그 여자를 보니 몸에는 홍초의를 입었고 머리엔 비취 비녀를 꽂았으며 허리엔 흰 옥으로 된 패물을 찼는데 선연하고 표묘하여 참으로 신선같아"

양소유와의 사랑 -
정사도 집안의 시비였지만 어려서부터 정경패와 함께 자라며 친자매 처럼 다정하다. 친자매 같은 정경패가 양소유에게 시집가게 되자, 자신도 함께 따라가기를 원한다. 정경패의 기지로 양소유에게 속은 정경패의 복수를 대신 하여주며 양소유와 인연을 맺게 된다. 
처음에 가춘운은 자신을 선녀라 속이고 양소유와 하루 잠자리를 함께 한다. 그리고 여러날 뒤에는 다시 본래는 선녀가 아니라 귀신이었다고 하며 다시 소유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때부터 줄곧 소유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고, 소유가 자신이 속은 것임을 깨닳은 뒤에도 그를 모시게 된다.

  5) 적경홍- 제 6부인

특징 : 계섬월과 함께 당대 최고의 명기로 불리운다. 

외모 : 양소유의 첫인상
"소년을 보니 용모의 수려함이 반악같고, 비록 위개의 맑음이라도 더 낫지 못할 듯해"
"푸른 눈썹과 맑은 눈, 구름 같은 머리와 꽃 같은 보조개, 가는 허리와 나약한 모습은 섬랑과 비슷해 보였지만 섬랑은 아니었다."

양소유와의 사랑 - 
연왕이 난을 일으키자 소유가 연왕의 항복을 받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다. 연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소유는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이 한필의 말을 타고 오는 것을 만난다. 이 소년이 바로 남장을한 적경홍이었다. 연왕을 피해달아나기 위해 남장을 한 것이다. 양소유는 도중에 또한 계섬월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잠자리에 들게 되었지만, 다음날 일어나 보니, 함께 있는 사람은 계섬월이 아닌 적경홍이었다.

  6) 이소화(난양공주) - 제2 부인

특징 : 황후가 아끼는 황제의 동생이다. 황후가 낳을 때 태몽으로 신선의 꽃과 붉은 진주를 보았다. 자라면서 용모와 기질이 신선 같아 세속의 태도는 한 점도 없고 문장과 여공(女工)이 일마다 남들보다 뛰어났다. 난양이 퉁소를 불면 매번 학이 내려와서 춤을 추곤 하는 것을 태후가 기이하게 여기고 특별한 부마를 얻어주기 위해 나이가 들어도 시집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외모 : 
"공주가 자라면서 용모와 기질이 신선 같아 세속의 태도는 한 점도 없고 문장과 여공이 일마다 남들보다 뛰어났다."

양소유와의 사랑 -
소유가 한림학사가 되었을 때, 술을 마시다가 여흥에 옥퉁소를 불자, 난양의 퉁소와 더불어 춤추던 청학 한 쌍이 공중에서 날아와서 춤을 추었고, 이를 알게된 태후는 소유의 인물됨을 기뻐하며 난양의 부마로 삼고자 결정한다. 그러나 이미 정경패와 혼약을 맺은 양소유는 이를 거부하고, 옥에 갇히기 까지 한다. 태후와 황제가 강제로 정사도와의 혼약을 깨려고 하자, 이는 도리에 어긋난다며 적극적으로 만류하고는 정경패도 함께 양소유와 결혼하게 하자고 말한다. 정경패가 용모며 재덕이 자신보다 더하다면 일생토록 우러러 섬길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 마음대로 하겠다며, 신분을 속이고 정경패를 만나본다. 결국 그녀덕에 정경패는 황후의 양녀로 들게 되어 영양공주가 되었고, 기꺼이 양소유의 제2부인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7) 심요연 - 제 7 부인

특징 :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여자도사의 제자가 되어 검술을 배웠다. 여자도사는 요연의 인연이 당나라에 있다고 하여, 그인연을 맺어주려고 검술을 가르쳤다. 

외모 : 양소유의 첫 인상
"구름 같은 머리를 높다랗게 올려 묶고 금비녀를 꽂았으며 좁은 소매 전포에는 석죽화를 수놓았고 마치 봉의 머리처럼 수놓은 신발을 꿰고 허리에는 용천검 갑을 차고 있는데, 자연 그대로의 절색이었다. 마치 한송이 해당화와도 같았고, 마치 종군한 목란이 아니면 금합을 훔치던 홍선인 듯하였다."

양소유와의 사랑 -
양소유가 토번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을 때, 토번국의 자객이 되어 양소유를 죽이러 오게 된다. 요연의 스승인 여자도사는 양소유가 요연의 인연이라고 하며, 토번국의 자객이 되어 소유에게 접근하여 인연을 이루도록 하였고, 결국 칼을 차고 소유의 진중에까지 들어오게 된다. 그날밤 바로 소유와 인연을 맺었고, 토번국을 이기도록 도움을 준다.

  8) 백능파 - 제 8부인

특징 : 동해 용왕의 딸이다. 남해용왕의 아들 오현의 청혼을 거절한 덕에 많은 핍박을 당한다. 가문 전체가 욕을 당할 것을 두려워 홀로 오랑캐 땅에서 생활하다가 양소유를 청하여 인연을 맺고자 한다. 

외모 :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은 신선과 같고 입은 옷의 화려함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양소유와의 사랑 - 
남해 용왕의 아들 오현이 청혼을 하지만 탐탁지 않게 여기자 백능파의 아버지인 동해 용왕을 괴롭힌다. 양소유는 물이 없어 고생하던 중 꿈을 꾸고 그 중에서 백능파를 도와 남해 용왕의 아들을 물리친다. 꿈이 깬 후 백능파의 도움으로 물을 얻고, 승리하게 된다. 이렇게 그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상 8명의 여인 모두, 배경만 다를뿐 예쁜 외모와 글잘쓰는 재주, 성격등은 모두 비슷하게 나온다. 서로간에 아무도 질투하는 사람이 없고, 서로 형제의 의를 맺기까지 한다. 이는 옥루몽에서 보여지는 여인들의 모습에 비해서 생동감이 덜 느끼지는 한계가 보인다.


3. 양소유의 사랑 방식 

  1) 소유의 사랑은 적극적이지 못하다.
양소유가 여덟 여인과 인연을 맺음에 있어 양소유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오로지 정경패와의 만남 한번 뿐이었다. 진채봉과의 만남은 진채봉이 먼저 시를 보내왔고, 계섬월은 소유의 시를 보고 섬월이 자신의 집으로 모신 것이고, 가춘운은 정경패가 소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적경홍은 계섬월의 기지에 의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심요연 역시 요연 스승의 분부대로 요연이 먼저 찾아온 것이었고, 백능파 역시 그녀가 먼저 소유를 청하였다.

  2) 소유는 여자에게 약하다.
양소유는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여자를 단 한번도 마다하지 않는다. 과거를 보러 가는길에, 과거 시험 준비에 바쁠 사람이, 두 번다 여자를 만나 인연을 맺는다. 다가오는 여자들이 귀신이던, 선녀이던, 용왕의 딸이던 상관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다. 심지어는 토번을 정벌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진중으로 심요연이 찾아오자, 그녀를 받아들이고 삼일동안을 헤어나오지 못하였다. 물론 그와 인연을 맺은 여자들이 모두 절대 미색을 갖춘 이들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여자에 약한 것 만은 사실이다.

  3)그렇다면 소유는 마마보이?
소유가 아기였을 때, 그의 아버지 양처사는 갑자기 신선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과거길을 떠나기 까지 소유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무척이나 큰 존재였을 것이며, 결코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렸을 때 신동이라고 조정에 천거되었지만, 어머니를 떠나기 어려워 나아가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런 그의 가정환경이 결국 그를 여자에게 약한 성격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이런 그의 성격은 흐드러지게 호화스러운 술자리에서도 나타난다. 월왕으로 인해 대취하게 된 것을, 짐짓 장난으로 난양공주가 월왕과 공모하고 자신을 취하게 만들었노라며 어머니로 난양에게 벌주를 내려달라고 말하며 시작되는 술자리에서 어머니와 여덟 부인들에게 둘러싸인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4. 양소유가 정말 사랑한 여자는 누구였을까?

  1)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양소유가 정말로 사랑한 여자가 누구였을까 하는 점에서 정경패와 진채봉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하였다. 진채봉은 양소유가 만난 첫사랑이었다. 소유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가춘운의 증언에 의하면, 가슴아픈 이별 뒤에, 늘 양류사 시를 몸에 간직하고 잠시도 떼지 않으며 항상 진채봉을 이야기할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러나 진채봉과 누각에서 시로 인연을 맺고,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하였지만 갑작스럽게 전란이 일어나 양민이나 천민 가리지 않고 군사로 충당한다는 말에 진채봉과의 만남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기 몸부터 피하고 본다. 전란이 끝난 뒤 진채봉을 찾아보지만, 그녀의 집은 이미 액을 당하고 노비로 팔려갔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소유의 마음이 동했던 것 같다. 온 가족이 액을 당하고 순식간에 어사딸에서 노비로 전락해버린 진채봉의 신세가, 갑작스레 떠난 아버지로 인해,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와 동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자연히 그의 마음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녀를 노비로 만들어 버리고 두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전란에 대한 안타까움과 원망이 섞여 늘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머니의 영향으로 인한 상처였을 뿐이다.

  2) 단 한번의 적극적인 사랑 !
마마보이 소유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일까? 물론 계섬월이 그녀를 천거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소유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여관(女冠)으로 변장을 하고 정경패를 찾아가 구애를 한다. 이는 천하의 명기 계섬월을 차지했던 경험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바로 그 계섬월이 천거한 여자라는데 대한 믿음이 같이 발동했던 것이다. 막상 대면하여본 정경패의 모습은 계섬월의 천거대로 아름다웠고, 음악과 문예에 조예가 깊었고, 또 소유를 속일 정도로 재기넘치는 여자였다. 그가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자였다.(물론 8명의 여인 모두가 부족함은 없지만....)
그런데 또한번 의외의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황후가 그를 부마로 낙점하면서, 거의 폭력에 가까운 만행으로 정경패와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전에 전란 가운데 진채봉을 지키지 못했던 양소유는 두 번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정경패를 지키기 위해서 죽기를 무릎쓰고 황후와 천자의 뜻을 거절하고 옥에 갖히기까지 한다.
얼마나 기구한 사랑인가? 다시한번 전란이 일어나고, 이번엔 대원수가 되어 전쟁에 나가며 그녀를 남겨두게 된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웠을까? 다시한번 진채봉과 같은 경우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꿈에서까지 정경패가 죽는 꿈을 꾼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갔을 때, 정말로 정경패가 죽었다는 것이다. 결국 황후가 맺어주는 공주들과 결혼식을 올리는 소유, 그런데 죽은줄 알았던 정경패가 영양공주가 되어 살아있을 줄이야...
정경패는 유일하게 그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또 지켜낸 사랑이다. 그의 사랑은 황제도 죽음도 갈라 놓을 수 없었던 목숨걸고 지켜낸 사랑이었다.
그래서 양소유가 정말로 사랑한 인물은 정경패라고 보았다. 진채봉은 가련함과 측은함에 정을 두었던 것이고, 다른 여인들은 여인들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양소유가 정말 목숨을 걸고 지켜내며 사랑한 인물은 정경패였다. 




아래의 시는 주인공 양소유가 진채봉과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읊어주었던 시 "양류사"입니다. 처음 이 시를 읽었던 중학생 시절 나로 하여금 고전문학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바로 그 키워드 같았던 시였지요.

<양류사((楊柳詞)>

- 양소유가 읇조린 시 
楊柳靑如織 양류 푸르러 짜는 것 같으니 
長條拂畵樓 늘어진 가지 구름 누각에 떨쳤더라. 
願君勤栽植 알고 싶건대 그대 부지런히 심은 뜻은
此樹最風流 이 나무가 가장 풍류 있음이리라 
楊柳何靑靑 양류가 어찌 이리 푸르를꼬!
長條拂綺楹 늘어진 가지가 비단기둥에 떨치었도다
願君莫漫折 바라건대 그대는 휘어잡아 꺽지 말라
此樹最多情 이 나무가 가장 정이 많음이로다.

- 진채봉이 지은 시
樓頭種楊柳 누각 머리에 수양버들 심었음은
擬繫卽馬住 낭군의 말 매어 머무르게 함이거늘
如何折作鞭 어찌하여 꺾어 채를 만들어,
催下章臺路 재촉하여 장대(章臺)길을 향하는고

- 양소유가 답한 시
楊柳千萬絲 수양버들 천만 실이
絲絲結心曲. 올마다 마음 굽이 맺히었도다
願作月下繩, 바라건대 달 아래에 놋줄을 지어
係定春消息. 좋이 봄소식을 맺으리라

<일신서적, 신동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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